아버지, 나의 아버지/장은초

 

 

문우들이 풀어놓은 수필에는 아버지에 관한 글 한두 편은 꼭 있다. 나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아버지에 관한 글에는 귀를 쫑긋 세운다.

팔도의 여러 아버지들 모습이 글 속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데 거지반은 필자들이 아버지와의 기억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가부장적이고 마초(macho)같은 아버지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딴살림 차리고 도박, 주폭으로 식구들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 아버지를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내 고향 친구 중에도 주폭 아버지로 인해 성장기 내내 적잖이 상처를 받은 친구가 있어 그 폐해를 익히 알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아버지의 삶에 대해 딸로서 우련한 연민을 느낀다. 누구보다도 아버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고 유년 시절 어느 구석을 회고해도 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은 지금도 눈물이 날 만큼 따스하다. 딸바보 아버지 덕분에 나는 행복했을지 몰라도 아버지 당신의 삶은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따스하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성격에서 기인한다. 풀꽃처럼 여린 심성으로 누구에게든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무등호인(無等好人)이셨다.

온순하고 유약한 아버지가 일생을 두고 여차저차 겪어야 했던 신산스러운 일들이 내 기억으로도 한두 번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께서 동네 어른 한 분과 언쟁을 벌이셨다. 그때는 무엇 때문에 그런 사달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어린 마음에도 전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논 때문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음직한 노름꾼 어른 한 분이, 노름빚에 시달리자 그예 너 마지기의 논을 갑자기 내놓았다. 애면글면 여툰 돈으로 아버지가 그 논을 샀는데 급매가 다 그렇듯 시세보다 좀 싸게 샀다는 이유로 노름쟁이 어른은 술자리에서 취기가 오르면 본전 생각에 아버지에게 지청구를 해댔다. 평생 화투장 한번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단지 논을 샀다는 이유만으로 두고두고 시달림을 당하셨다. 논을 거저줍기라도 한 양 빈정대며 마구발방을 일삼자 참다못한 어머니가 대리전을 치른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 밭과 이웃한 사람이 아금받게 밭둑 근처까지 바짝 붙여 농작물을 심었다. 그러고는 우리 밭둑 경계선을 허물며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어도 아버지는 별달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다.

 찰깍쟁이처럼 발밭게 덤비는 사람들에게 맞서지 않고 아버지는 늘 좋은 게 좋은 식으로 대충 헐겁게 손해 보는 쪽을 택하셨다.

애초 그런 왈패같은 사람들을 감당해 낼 깜냥도 없이 유약하기만 하셨으니 당신 스스로 견뎌낸 자괴감과 스트레스는 얼마였을까. 아마도 속이 상하다 못해 아주 문드러졌을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아버지가 살았던 시절에는 아버지를 점잖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고 칭송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각박한 세월을 살았다면 점잔이보다 어리보기 취급하며 십중팔구는 아버지에게 분탕질 치려고 법석을 피우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30년도 넘었다. 후덕한 아버지 덕분에 내 유소년 시절은 더없이 행복했지만 나는 이제 마냥 온순하고 물렁팥죽 같은 아버지를 원하지 않는다. 그건 아버지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불교에서 말하는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내 아버지는 풀꽃처럼 여린 아버지가 아니라 이종격투기 선수 추성훈이나 미국의 꽁지머리 배우 스티븐 시걸처럼 강골이었으면 좋겠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오금이 저리고 위압감이 들게 하는 스트롱맨 아버지로 말이다. 아니 더 욕심껏 하자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천하장사 헤라클레스 같았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도선(徒善)이 불여악(不如惡)이라 야죽대며 이젠 점잖고 순박한 사람이 더 이상 대접받는 세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도처에 내 아버지처럼 가녀린 심성으로 세상풍파에 맞서 가슴앓이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나로서는 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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