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간, 그 어리석은 구분

지구는 초속 30km의 속도로 태양을 돌고 있다. 제 스스로는 하루에 6,300km를 한 바퀴로 회전한다. 숨 한 번 내쉬는 사이에 30km를 달리는 별 위에 살면서 시간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시간이란 이렇게 허무하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엄정하다.

누가 시간을 만들었을까. 인간의 지혜가 편리성을 위해 만든 모든 것 중에 가장 획기적이면서 동시에 어리석은 결과물이 바로 시간 아닌가 싶다. 해질녘에 만나기로 약속하면 곤란한가.

산수유 피거든 돌아오리라고 말했던 사람을 겨우내 기다리면 어떤가. 우리는 지금 흘러가는 강물 위에 하루하루 눈금을 매기며 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갇혀있다는 자체도 모르면서.

이제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며 시민들은 환호하고 폭죽도 만발했지만 그 순간에도 이 별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시간과 돈 중에 어떤 것을 먼저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가치교환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겠고 그 가치의 중심에 시간이 있음을 알아냈다면 돈이 먼저겠다.

그러나 우리는 돈과 시간의 톱니바퀴 사이에 협착(狹窄) 된 신세와 다름 아니다. 결국 가치라는 명제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 자승자박이라는 말이다. 많이 가진 사람이나 적게 가진 사람 모두 박탈감과 고통을 느끼고 있다. 사회적 문제인지 본연의 업보인지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존재 모두가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 무거울 뿐이다.

나는 지난 한 해 정치인을 욕하고 사회를 비판했으며 칼럼이라는 무딘 칼로 다른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시(詩)라는 두레박으로 동정도 사랑도 아닌 감상들을 함부로 퍼붓기도 했다. 이제 새해라는 허상 앞에 어떤 다짐을 해야 할까. 막막하기만 하다. 해마다 조금씩 두려움이 늘어간다.

세상과 타인을 향했던 나의 시선이 문득 부끄럽다.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삿대질하는 자신의 손을 보라. 검지는 상대를 향하고 있지만 엄지는 약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의 가슴을 향하고 있음을 아는가. 흔한 말이지만 우리가 새겨야할 진리이기도 하다.

습관적인 반성을 경계해야 한다. 결과 없는 반성은 기만일 따름이다. 익숙함이 뻔뻔함으로 진화하기도 하고 뻔뻔함은 능숙한 사기꾼의 신분증이 되기도 한다. 정당한 요구인 양, 올곧은 사유의 창을 뽑아든 척하며 나서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거든 상대를 비난하고 합당한 대안을 가졌거든 목소리를 높여도 되겠다. 아니거든 내면을 돌아보라. 출근하며 동네 어르신에게 인사도 나누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를 무례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살기 힘들다는 소리만 가득하다. 실직자가 넘쳐나고 창창한 젊은이들은 시급(時給) 몇 천 원에 매달리고 있다. 남는 음식이 썩어가는 마당에 굶어죽는 처녀도 있었단다. 집값은 맞벌이 부부의 무릎을 꺾고 은행이자는 가장의 허리를 분지르고 남을 기세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루 행복한 세상은 역시 허망한 신기루일까. 서릿발처럼 칼날 선 하루를 맨발로 디디며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돈이 다는 아니지만 돈이 대부분을 해결하는 세상인데.

시간을 구분하는 자체가 어리석다 해도 그 어리석음이 또한 희망임을 부정하지 않으련다. 무지개는 잡을 수 없어도 저 산 너머에 선명히 보이지 않는가. 뒤통수 맞으며 살아낸 세월 때문일까. 그 무지개를 잡겠다는 다짐은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거기 있음은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았으면 한다. 가슴 속에 영롱한 하나를 품고 있지 않다면 이 회색빛 세상을 어찌 견디겠는가. 시간도 이와 같다.

해가 바뀐다고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이지만 까짓 세상 두려울 거 없다. 사람마다 빈부의 높낮이가 다르고 세상인심 평등하지 않지만 시간은 공평하게 나눠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막막하고 기댈 곳 없거든 아침 해를 바라보라. 올해는 잘 될 거라고 식구들 손잡고 한 번 웃어보자. 새 달력 펼치며 생일과 기념일들을 적어보라. 작은 선물이라도 미리 생각해두면 푸근하지 않을까.

일어서야 한다. 하루하루 눈금 매기며 절망했었고 때로는 후회했던 그 강에 손 씻었거든 일어서야 한다. 돌아보지 말고 서로의 체온을 나눠야 한다. 해마다 허방지방 살았더라도 또 한 번 속아봐야 한다. 다를 바 없는 내일을 새해라고 속이며 시작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속임수가 이것 말고 또 있을까. 어리석지만 아름다운 그것 말이다.

프로필

시인

컬럼집 『부드러운 칼』(2006)

시집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2017)

산문집 『좋은 말』(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