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

박현경

어느 초가을 아버지가 뜰 앞에 핀 옥잠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아직 햇볕은 따가워도 바람은 선선한데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어 사전을 이리저리 뒤적이는 데 딱히 열중하는 것 같지는 않으셨다. 좋아하는 테니스도 안 가고 집에만 계시는 것이 쓸쓸해 보였다.

60여 년 전 내가 꿈을 그리던 열일곱 소녀시대 이야기다.

남동생 넷, 친척 셋, 일곱 명의 남자들이 공부하다가 쉬려고 하나, 둘 방에서 나왔다. 철봉에 매달리고 역기를 들어 이두박근을 단련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진돗개 ‘복이’하고 놀며 휴식을 하고 있다. 조용하던 집안이 시끌벅적해졌다. 휴일 우리 집 풍경이다. 식구가 많으니 밥상에 자주 오르는 반찬은 콩자반, 멸치볶음, 콩나물, 가끔 장조림이 올랐다. 토속적인 반찬이라도 밥상머리에서는 말이 사라진다. 어쩌다가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별식 준비로 부산하셨다. 우리도 덩달아 입이 호사하는 날이었다. 여름 별식은 호박선, 오이선으로 깔끔한 어머니 손맛이 특별했다. 겨울이면 하얀 눈발이 날리는 것을 보며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만두도 자주 빚어 밥상에 올렸다. 고추장 호박찌개, 오이지무침, 굴비, 어리굴젓, 동태찌개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이다.

“호박풀떼기 좀 만들어 주어요, 호박풀떼기가 갑자기 먹고 싶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주문하시던 음식이다. 준비가 없어 당황하셨을 텐데 어머니는 정성 들여 죽을 쑤어 아버지 입맛을 다스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색 호박죽을 아버지는 맛있게 드셨다. 우리도 처음 먹어 보는 아버지의 호박죽이 얼마나 맛이 있는지 호기심에 찬 눈을 반짝이며 둥근 밥상에 바싹 다가앉았다. 색도 예쁜 죽이 맛있을 것 같아 먹었는데 보기와는 달리 ‘밍밍’하여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삼빡하지도, 새콤달콤하지도 않아 나는 한두 술을 먹다가 죽 그릇을 밀어 놓았다. 동생들도 이미 고려당 사라다 빵 맛에 익숙해 있어 어머니 눈치를 보며 수저를 놓았다.

“강낭콩이 없네, 좀 넣고 끓이지 그랬어.”

아버지도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맛이 아닌 듯 아쉬운 표정이었다. 나의 친가는 경기도 오산으로 아버지는 13세까지 시골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에 할머니를 잃으셨단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니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오셨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어머니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나 자랐고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호박풀떼기를 먹고 자랐고 어머니는 먹어 본 적이 없어 당황하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호박풀떼기 만들기는 실패작이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모정이 담긴 손맛을 어머니의 정성이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밍밍한 호박죽’ 사건이 있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승진 누락으로 ‘욱’하는 성미에 사표를 내고 오셨단다. 무거운 마음의 상처를 혼자 삭이며 집에 계셨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고 싶어 옥잠화를 보고 계셨던 것 아닐까.

그 후로 괴로울 때 위로받고 기대고 싶을 때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호박죽을 주문하셨다. 할머니의 손맛을 기대했을 테지만 아버지 입맛을 속이지 못했다. 모정은 얼마나 질긴 끈일까.

어머니가 육 남매를 키우느라 정성을 기울일 때 그것을 보는 아버지는 더 외로우셨을까.

“너희는 엄마 품이 얼마나 좋은 줄 아니?”

아버지는 항상 의젓하고 당당하신 줄만 알았는데 마음 한쪽은 늘 비어있었던 모양이다. 그 깊은 아버지의 속정을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 마음을 보듬어 드리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홀연히 소풍을 떠나셨다.

나는 호박죽을 좋아한다. 달달한 맛에는 아버지의 살뜰한 마음이 배어 있는 듯하다. 삼십 년 전, 한 지하식당에서 친구를 만나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빙빙 돌아다니다가 호박죽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선뜻 “우리 호박죽 먹자.” 친구도 흔쾌히 죽집에 가자고 했다. 주문을 하자 노란 호박죽이 먹음직스럽게 나왔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한 ‘밍밍’한 호박죽이 생각났다. 고운 노란색에 끌려 덥석 한입 먹었지만, 단맛이 가미되어있지 않아 맛이 없었다. 지금 이 호박죽은 변신한 것일까. 작은 도자기에 담긴 호박죽을 먹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운 아버지 얼굴이 은은한 수채화가 되어 어른거린다.

지금은 좋은 세상이라 아버지가 좋아하는 강낭콩을 넣은 호박죽도 얼마든지 사서 먹을 수 있다.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호박죽을 먹고 싶은 내 마음을 하늘로 띄워 보낸다.

행복해하시는 아버지를 하루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 ‘아버지의 호박죽’은 고향의 맛이다.

[작가소개]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열정의 합창’ 등 공저

현대수필 문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