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이운순

치열했던 한 한여름을 보내고 삼십 년을 살아온 내 동네를 떠나올 때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11년 전, 250여 평의 대지 위에 희망과 기대감으로 지었던 내 보금자리가 헐릴 것이라는 예견만으로도 우리는 맥없이 이별을 수용해야 했다. 이미 수년에 걸쳐 소문처럼 들리던 민자 고속도로의 신설이 공식화되고 시작과 함께 가속화되기까지 모든 절차는 급물살을 탔다. 진행은 너무도 빠르게 이어져 내 집을 둘러싼 주변 이웃이 하나둘 떠나가고, 흉측한 몰골로 헐리는 모습도 지켜보아야 했다. 온종일 소음과 흙먼지와 싸우며 남아있는 우리는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9학기에 접어들어 졸업 학점을 채워야 할 나의 시간과 취업 시험을 앞두고 온종일 책상 앞에서 보내야 했던 작은애의 금쪽같은 시간을 온종일 건축 폐기물을 실어 나르는 대형트럭과 중장비소음을 견뎌내다가 쫓기듯 동네를 떠나왔다. 인간들의 편리한 생활을 위한 문명의 이기, 그 필요불가결한 제도는 합당하다거나 충분한 보상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상처를 준다.

학교 친구들과 하는 오랜 모임이 하나 있다. 그 모임은 한껏 멋 내고 다니던 아가씨 때부터 하나둘 결혼을 하고 아이의 엄마가 되고, 중년이 된 지금까지 우리는 주위에 부러움을 살 만큼 견고한 모임이었다. 자부심을 느낄 만큼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도 높아 소위 말하는 여자들 특유의 시기나 질투까지도 모두 초월한 사이라고 믿어왔고 또 사실도 그러했다. 그러나 지난봄,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오면서 우리 모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많고 많았던 우리의 추억에 하나를 더하게 될 오키나와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인천공항에서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가까운 을왕리 한 횟집으로 향했다. 아내를 마중 나온 한 친구의 부군이 아내의 오랜 친구들의 뒤풀이를 위해 제안을 했고 마침 여행의 아쉬움이 남아 이른 저녁을 먹고 헤어질까, 찜질방 수다를 이어갈까, 하던 차에 적격인 제안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여행에서 막 돌아온 들뜬 중년 여인들이었고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왔다는 행복감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자정이 다 되어 각자의 집에서 가족들과 여행의 뒷얘기에 열을 올릴 즘 우리는 한 친구로부터 모임에 그만 나오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자 특유에 짧고도 간결한 문장에는, 더 이상의 관심과 관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단호하고도 냉기가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문장의 낯섦,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은 뭘까? 갑자기 찾아온 이별 통보에 미움과 서운함이 급격하게 밀려온다. 각자의 유년 시절을 빼고 거의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늘 지척에서 지켜보며 임의로이 지내왔던 시간이 갑자기 모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砂上樓閣)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그동안 너무 가까워서 행해지던 관심과 친구여서 더 안타까운 사랑의 질타도 조언도 모두 버거웠던 것일까? 너무 친하고 너무 사랑해서, 더러는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던 간섭과 관심이 그녀로 하여 더 지치고 외롭게 했었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일련의 상황을 돌이켜보니 우정과 사랑이라는 베일로 가린 채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던가를 생각하게 한다. 시부모 봉양을 다 하고 마지막까지 며느리로서의 절차가 모두 끝난 친구의 경험에서 나오는 조언이나, 완벽을 기하는 성향이 있는 친구의 지적까지 표면적으로는 모두 웃음으로 보아 넘기던 친구는 남모르게 상처를 받고 있었던가 보다. 어떤 말들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녀를 아프게 했을까, 여행의 흔적에서 유난히 활짝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처음엔 그녀로부터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우리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는 자책에 괴로웠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너무 친하고 가까워서 상처인 줄 모르고 무상심하게 내뱉던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왜 우리는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을까.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자신해 왔었고 또 어지간한 지적이나 조언도 모두 사랑이요 관심이라고 믿어왔던 자신을 돌아보며 서로에게 주었을지도 모르는 상처에 대해 깊은 후회를 하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무진히도 애를 썼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보자.’고 서로를 다독이고 기다리려 했지만, 그녀는 우리 기대에 선을 그었다. 모임에서만 몸을 뺀다던 애초에 그녀 말처럼 그녀와는 전화 통화도 하고 가끔 얼굴도 보고 차도 마신다. 그렇게 표면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변별력을 잃은 남은 친구들의 방황은 오래갔다. 모임의 존속 유무를 놓고 고민하는 친구도 생기고 그런 고민을 했던 자체가 또 서운해 상처를 받는 친구도 있었다. 두 마음 다 모두 이해가 간다. 모두 사랑해서 벌어진 일이고 사랑해서 받는 상처가 아닌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고받는 상처는 대부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가깝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기대치가 커지고 호감도가 상승해서 자칫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벗어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렇다고 꼭 우리의 인간관계가 교과서에나 나오는 것처럼 틀의 맞춘 것처럼 정형화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하게 건네는 일상어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살 조금만 빼면 더 예쁘겠다.’라거나 ‘너무 말랐다 살 좀 쪄야겠어.’라는 관심 표명도 역시 당사자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상처의 종류는 다양해 가족에게서도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는 이해를 통해 곧바로 해소되기도 하지만 내내 진행 중이면 상처가 깊다. 온 국민적 캠페인 금연 광고, 수위를 높여가며 펼쳐지는 금연 캠페인의 과도한 표현에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술이며 담배며 호불호를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기호품이지만 내 아들의 흡연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기를 무사하게 넘어가 안심했었지만 군 생활은 내 아이를 흡연자로 만들었다. 이후 아이는 어미와의 무수한 대립각을 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요.’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시키지만, 흡연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기에 아들에 대한 제재를 멈추지 못하는 내 상황도 변하지 않는다. 간청과 질타로 이어지는 어미의 회유에 ‘언제까지만’이라는 틈을 만드는 결단력 없는 아들에게 또 실망하고 상처를 받는다.

인과관계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온다. 어쩌면 지금 내가 받는 상처는 나 자신이 언젠가 만들어낸 불씨였을 수도 날카로운 가시였을 수도 있다. 너무 친하고 사랑해서, 혹은 가까워서 주고받는 상처는 무수하게 많았을 것이다. 친구 혹은 동기간이나 사회의 여러 인과관계 속의 발생하는 크고 작은 오해와 갈등을 해소하기에는 소통이라는 처방이 있다. 갈등의 간극을 좁히고 화합을 위한 소통의 방법론을 두고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상처받는 것이 두렵다면 무엇보다 타인을 위한 배려가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 혹은 ‘우리’라는 이기심으로 벽을 만들기보다 모두를 아우르는 배려야말로 인과 관계의 꼭 필요한 필수 덕목이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작가소개]

계간 에세이문예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비타민이 열리는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