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달(晩達)

이사명

결혼식장을 가려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유심히 나를 보시더니 말씀하신다. “얘야, 이 선선한 초가을에 무슨 옷을 그리도 많이 껴입느냐? 너는 가을보다도 겨울을 더 좋아했다. 이런 가을날은 말할 것도 없고, 동지섣달에도 너는 옷도 안 입고 당산나무아래서 ‘십오야 보름달’이란 노래만 부르던 아이였다. 내가 중얼중얼해보다가 너한테 가르쳐줬는데, 그 노래를 나중엔 네가 부르고 다니더라.”

나는 웃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 그 노래 곡이 이래요?” 하고 한번 불러봤다. “그래! 맞다 맞아!, 그렇게 한단다.” 어머니와 나는 한참을 마주보고 웃었다. 어머니는 딸이 가사와 곡을 잊어버리지 않은 게 신기하신 것만 같다.

십오야 보름달은 / 구름 속에서 놀~고

일등명창 하중성은 / 장구바람에 논다.

이 짧은 노래는. 내가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부르던 일명<십오야 보름달>이란 노래로, 판소리 공연 도중에 나온 대목일 것이라 짐작된다. 어머니가 공연을 보고 오셔서 가사를 붙여 부르셨던 노래를, 내가 따라 불렀기 때문에 가사와 곡은 확실치가 않다. 다만 더늠(명창이 노래를 잘 살려보려고 공연 중에 자신만의 장기를 더 넣는 대목의 가사)이거나, 발림(극적으로 소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손짓이나 몸짓으로 표현하는 동작)의 고저 후렴구를, 어머니가 좋은 마음에서 막내딸을 등에 업고 어르면서 부르셨던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판소리는 조선 숙종 대에 그 틀을 잡기 시작해, 조선후기 명창 진채선(陣彩仙)이 발굴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2003)에 지정되었을 정도로, 우리 민속고유의 예술음악이기도 한 판소리는. 지금도 동편제 서편제의 기능보유자가 전수되고 있을 만큼 아름답고 서정적인 음악이다.

어린시절, 나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의 한 유파인 서편제를 들으면서 자랐다.<심청가><춘향가><진도아리랑>등이다. 서편제는 선이 굵은 남성적인 분위기의 동편제와는 달리, 여성적인 부드러움으로 섬세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인생의 한을 소리에 담았다. 어린마음에도 음색이 아름다운 소리의 굴림에다 노래 대목마다 기교 넘치는 감칠맛으로,

양념으로 치는 아니리가 좋아서 매번 웃으면서 들었다. 그래서인지 공부는 특출하게 잘하지 못했지만, 노래의 곡은 대충 어떻게 흘러갈 수 있을지 가늠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나라고 그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민족고유의 노래가 있다. 우리의 경우도 시대를 대표한 민족고유의 노래들이 있다. 불교적 색체가 강한 신라향가를 비롯해 역사적 배경을 담은 고려의 정과정곡(鄭瓜亭曲), 조선의 판소리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판소리가 으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서민예술이기도 한 판소리는 양반도 중인도 다 좋아했던 노래이다. 그 노래는 예로부터 종교적인 색체도 개인적인 정서를 담아내기도 했지만, 시대를 대변하고 초월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노래마다 나름의 색깔과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한데. 시대가 변해도 곡은 달라질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한 노래가사는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 우리 집 앞 팽나무 아래서 윗도리를 벗어던진 아이가 달빛을 받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하나의 영상으로 본다. 이순의 나이가 되었지만. 내 놀이마당이 되어줬던 팽나무그늘, 툇마루, 노래만 부르겠다고 때 쓰는 동생을 억지로 업어서 데려오곤 했다는 오빠의 모습 등이 잡히지 않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시골이었기에 망정이지 도시라면 어떠했겠는가 하고 괜한 걱정을 해본다. 섣달 그믐생인 나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동네사람들 눈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머니가슴을 더듬어 젖을 찾아먹었단다. 어머니는 다 큰 딸에게 젖을 물리기가 민망해 늘 지정노래 2곡을 듣고서야 젖을 주셨다 한다.

나는 그 무엇에 비해 노래를 좋아한다. 그래선지<십오야 보름달>란 판소리 한 토막은 늘 내게 많은 향수를 준다. 오빠는 이 노래를 내가 3살이 되기 전부터 불렀다고 귀띔해주었다. 그 때는 노랫말의 뜻조차 모르고 어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불렀다.

하지만 정말 구름 속에서 달이 놀고, 명창은 인생마당의 장구바람에 놀지 않는가. 곧 고수의 추임새(얼씨구, 흥, 그렇지, 저런 등)의 강약에 따라 소리꾼의 감정이입 선이 갈라지고 여흥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등 명창은 고수를 잘 만나고 못 만남에 따라, 청중과의 교감이 잘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해서 공연의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

나는 일 년에 두서너 번 노래를 부를 기회가 오지만. 주로 달 타령이나 새타령을 부른다.

<달 타령 1절 중>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정월에 뜨는 저 달은 새 희망을 주는 달

삼월에 뜨는 저 달은 처녀가슴을 태우는 달

…….

<새타령 1절 중>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 중에는 봉황새 만수 문전에 풍년 새

상고곡심 무인 초 수렵비조 뭇 새들이

…….

우리가 사는 여러 인생의 모습도 노래에서 보여주는 가사처럼. 어쩔 수 없이 사계절의 풍향을 받고, 사계절의 오묘한 위치 속에서 그 영향을 짙게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저 멀리서 환하게 비춰주는 보름달처럼 인생의 밤길을 도와주고 희망도 품어주면서 살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놀고 뛰어야 할 달도 십오야 보름달이면 좋겠고, 우리가 품어야 할 달도 이뤄야 할 달도 만달(晩達)이면 좋겠다.

약력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광진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저서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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