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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벌’유감
류상용
지난 9월 둘째 주말,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다녀왔다.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왔던 벌초를 더는 미룰 수 없어 대충 짐을 챙겨 차에 올랐다. 친지 결혼식 등이 있어서 늦은 밤에야 출발해 일요일 새벽녘 고향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밤새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피곤한 몸이었지만, 도와주는 사람 없이 홀로 그 넓은 묘지를 벌초할 생각을 하니 잠시라도 눈 붙일 여유가 없었다. 고향 마을 뒷산 중턱의 가족묘지 면적은 약 6백여 평으로, 여덟 분 조상님들의 산소가 있다.
연료를 가득 채운 예초기와 필요한 공구를 챙긴 나는 낡아빠진 전투화를 꺼내 신고, 밀짚모자와 보안경으로 무장하여 산소로 향했다.
계절은 가을 문턱이지만 유난히도 더웠던 올여름의 막바지 날씨는 중복더위를 방불케 한다. 대문을 나서서 선산을 향해 잠시 걷다보면 농로길 양 옆으로 밭들을 지나 짧은 산길과 들길이 이어진다. 초가을의 따가운 햇볕을 받고 무성하게 자라있는 억새풀과 질경이, 강아지풀, 이름 모를 다양한 들풀들이 더위에 늘어져 있었다. 밭작물들이 좌우로 펼쳐진 시골길을 걷다보니 어릴 적 추억들이 오래된 영화필름 속 장면들처럼 스쳐 지나간다. 후덥지근한 날씨임에도 폐부로 스며드는 농촌의 맑은 공기와 낮 설지 않은 풀냄새가 뒤섞여 상쾌함이 더해진다.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예초기 소리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초등학교 친구 A의 가족묘지에서 일가족 서너 명이 모여서 벌초를 하고 있었다. 친구네는 20평도 안 되는 좁은 면적에 아버지 산소와 형님의 납골묘, 그리고 아직 생존해 계시는 어머니가 묻힐 가묘 등 3기의 산소가 있다. 한 사람이 해도 30분도 안 걸릴 벌초를 형제들이 모두 모여 정담을 나누며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다.
6,70년대에 대다수 농촌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그러했듯이 A 집도 몹시 가난했다. A의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하거나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고단한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남의 집 일을 하던 날이었다.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를 과하게 마시고 동력 탈곡기로 벼를 털다가 그만 한쪽 팔이 빨려 들어가 왼쪽팔꿈치 아래를 절단하는 사고를 당했다. A의 형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애머슴을 하거나 인근 염전에서 노동일을 하며 살아갔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A 또한 부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후, A와 나는 십년이 흘러도 한번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애옥살이 속에서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띠앗으로 똘똘 뭉쳐 화목하게 지내면서, 벌초하는 날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모든 형제가 모여 잔치를 벌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눈물겹도록 부러웠다.
한편 우리 가족묘지에서 북서쪽 아래 벌판에는 초등학교 동창생 B의 가족묘지가 있다. 그 친구 집도 A친구네처럼 가난하여 남의 집 사랑채에서 부모님과 5남매 등 일곱 식구가 살았다. B를 포함한 형제들 역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밥자리를 찾아 객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지금도 쉽지 않은 도시생활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 또한 객지 생활 탓인지 주말이면 내가 벌초하는 날과 그들이 벌초하는 날이 겹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오늘도 나는 혼자서 6백여 평이나 되는 묘지의 벌초를 하고 있는데,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한 무리 사람들이 각자 손에는 차례 지낼 음식이며, 낫과 갈퀴 등을 들고 나타났다. 남자 두어 명이 예초기로 풀을 베면 여자들은 베어진 풀들을 갈퀴로 긁어내면서, 이들은 한 시간도 안 되어 벌초를 끝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음식으로 차례를 지낸 후 서로 음식과 술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띠앗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먼발치에서 이들을 지켜보노라니, 혼자 땀 흘리며 벌초하는 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느 해 인가, 그날도 ‘나 홀로 벌초’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넋두리 하듯 친구 B 가족들의 벌초 풍정을 들려주면서, 내년에는 나도 두 아들을 데리고 벌초를 다녀와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일을 해보지 못한 아이들이 무슨 벌초를 하냐며, 학원을 빠지게 할 수 없다는 핀잔만 주었다. 한 이틀 학원 수업을 빠지더라도 모처럼 부자가 조상님들의 산소에서 땀 흘리며 벌초를 하는 경험은 훌륭한 인성교육이라는 내 생각과 아내의 아이들 교육 생각은 외계만큼이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벌초를 10년 가까이 혼자서 해왔다. 직업상 바쁜 가운데서도 한 해를 거르는 일 없이 정성을 다해 매년 벌초를 한다. 보통 때는 서울에서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일찍 고향집에 도착해서 일요일까지 1박 2일 동안 비 오듯 땀을 쏟으며 점심시간 외에는 쉴 틈도 없이 ‘중노동’을 해야만 귀경 버스 시간 안에 벌초를 끝낼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 시간에 늦을 새라 정신없이 예초기를 휘졌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살생도 범하게 된다. 산소 위나 주변 풀밭에 한가롭게 앉아있던 방아깨비며 여치, 메뚜기 등 풀벌레들이 예초기 칼날과 비산먼지, 굉음에 놀라 혼비백산하기 일쑤이다. 가끔씩 운 없는 녀석들은 예초기 날에 희생되기도 한다. 어떤 녀석들은 다리나 날개가 부러지거나 찢기는 등 중상을 입은 채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 죄인이 된 느낌이다. 하찮은 곤충일지라도 살생을 하였다는 생각이 한동안 마음을 무겁게 한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는 방아깨비나 메뚜기는 물론, 뱀이며 개구리까지 잡아 구워 먹었다. 심지어 나무에 올라가서 새알을 꺼내기도 하고, 기와집 처마 끝 틈 사이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집에 손을 쑤셔 넣어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조차 잡았으니 죄 없는 새나 곤충들을 놀이삼아 살생을 한 셈이다. 벌초를 하다 보니, 비록 미물일지언정 어린 내게 희생된 수많은 생명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예초기의 풀잎처럼 흩어진다.
나의 아버지는 2대 독자로 태어나 형제나 가까운 친척도 없이 외롭게 살아오셨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7남 2녀의 9남매를 두었다. 아버지는 37년 동안 철도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는 부족한 자식들의 학비를 박봉으로 충당하면서 큰딸을 제외하고는 모든 자녀들을 고등교육까지 시켰다.
부모님의 처절한 희생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형제들은 서울과 지방, 그리고 외국에서 나름대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시재나 벌초를 함께하는 형제는 거의 없다. 매년 시재나 벌초를 앞두었을 때 참석이 가능할듯한 일부 형제나 친척들에게 동참을 요청하면 그들은 그때마다 갖은 핑계를 대며 손사래를 쳤다.
이 같은 일은 비단 우리 집안 사정만이 아닌 듯하다. 시골에서도 어설프게 좀 배웠다는 사람들과 비교적 부유한 집안 가운데 일부는 ‘나 홀로 벌초’가 적지 않다. 같은 고향 마을 출신으로 지방대학 교수를 하는 친구 C도 매년 ‘나 홀로 벌초’를 하는데, 그를 동병상련으로 바라보며 스스로 위안을 삼곤 한다. 하기야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혼밥’, ‘혼술’족이 보편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혼자 벌초하는 ‘혼벌’족 되는 것 또한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혼자라도 벌초하며 선산 관리를 하겠다는 마음이지만 다음 세대가 실로 걱정이다. 외국이나 서울 등 먼 곳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이나 조카들을 벌초하고 시제 모시라며 매년 불러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벌초, 시제 등 우리의 미풍양속을 이어나갈 후손들 마음은 점점 멀어지고 참가자도 줄어드는 현실이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뭔가 획기적인 대책이나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작품설명]
‘강남신문’ 발행인
단국대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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