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기

민 혜
 

책을 읽을 때 손에 연필이 없으면 나는 불안감을 느낀다. 볼펜은 안 되고 반드시 연필이어야 하는 남다른 강박증까지 있다. 읽던 글에서 뭔가 끌리는 게 보이면 즉시 밑줄을 긋는다. 그래야 그 내용이 머릿속에 안착되는 것 같다. 이북(E-book)이 제아무리 대세가 된다 해도 종이 책에 연필 흔적을 남겨야만 비로소 책을 읽은 것 같은 나에게는 요원한 얘기다. 가급적 볼펜을 쓰지 않는 건 줄을 칠 때 혹시라도 삐뚤빼뚤 그어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데, 나는 다소 성미가 급해서 책을 깨끗이 보려면 언제라도 수정 가능한 연필이 안성맞춤이다. 마음 가는 내용에 바로 줄을 긋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면 잡은 고기가 달아나는 것만 같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인용하고자 나중에 그 대목을 찾으려 하다가 어느 책의 어느 대목이었는지 아리송해 허탕을 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의 기분은 비상금을 쓰려는데 어디에 두었는지를 몰라 못 찾는 것처럼 안타깝고 목이 탔다.

글자판 하단엔 작은 글씨로 정현종의 ‘방문객’이라고 쓰여 있다. 시인이란 역시 촌철살인의 명수들인가 보다. 나는 그만 내 상상력의 상투함에 멋쩍은 웃음을 흘려야 했다.
밑줄 긋기란 새로운 만남이다. 여기엔 공감과 감탄, 강한 긍정이 수반된다. 밑줄 긋기란 이미 인지하고 동조하던 사유에 대한 재확인이자 지지이기도 하다. 때론 그것에 강한 반감과 의문 따르기도 하나 밑줄을 그었다는 자체로 일단은 그 내용에 나포되었다고 봐야 한다.
밑줄을 그을 때 세상사는 잠시 물러난다. 오롯이 그 속으로만 편중되고 몰입된다. 활자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고 때로 미적 떨림의 그림이 되었다가 가슴 찡하는 음악으로 울렸다가 뇌성을 질러대며 나른한 내 골수를 쪼개 놓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밑줄 긋기란 이렇듯 놀라운 일인 것이다. 독자를 꼼짝없이 결박시킨 채 동서고금으로 유영을 시키는가 하면 새로운 앎을 전수하거나 한 작가의 진액을 수혈하여 상대의 사상을 뒤엎기도 하는 거니까.
그것은 또한 정신적 사냥이다. 연필은 수렵을 위한 창이자 화살이요 순간 포획된 문구들은 일용할 양식들. 하기에 처음 긋는 밑줄은 갓 잡은 날고기의 신선한 풍미와 함께 내 심혼의 허기를 채워준다. 아무리 권태롭다가도 밑줄 긋기를 하고 나면 머릿속이 깨어나며 생기가 도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는 또 하나의 책을 곁에 두고 뭉툭해진 연필심을 깎는다. 날 선 창끝이 반짝 빛나고 있다.

[사진설명]

1992년 ‘창작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
저서 ‘장미와 미꾸라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