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廉恥)

김 상 환(동백)

아내 심부름으로 집을 나섰다. 쌍둥이를 키우느라 힘들어 하는 딸에게 주려고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해 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팔이 몹시 아파온다. 오늘따라 허리까지 아파서 무거운 짐을 오랫동안 들고 가기가 힘들다.

군자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평소 같으면 한가한 시간인데 빈자리가 없다. 노약자석을 보니 양쪽 좌석마다 가운데 한 자리씩 비어있다. 나도 노약자석에 앉아 갈 나이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노인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아 평소에는 그쪽으로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앉아 가야겠다.

그런데 두 곳 모두 작은 짐이 놓여있다. 한쪽 빈자리에는 보자기로 싼 짐이 놓여 있고, 반대편에는 핸드백이 놓여있다. 아무래도 보자기로 싼 짐보다는 핸드백을 치워 달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 그쪽으로 갔다.

“죄송하지만 제가 들고 있는 짐이 무거워서 그러니 옆에 좀 앉아 갈수 없을까요?”하고 정중하게 부탁 했다. 그러자 환갑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익모초 씹은 표정으로 나를 힐끗 한번 쳐다봤다. 핸드백은 치워주지도 않고 턱으로 건너편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맞은편에서 처음부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이 지긋한 남자분이 보따리를 치워 주면서 나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지난 봄날에 목격했던 일이었다. 머리가 하얗고 연세가 지긋한 노인이 서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바로 그 앞에 앉아가는 젊은이가 책을 열심히 읽다가 고개를 들고 그 노인을 한번 쳐다보더니 바로 일어서서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자 노인은“고맙소, 그러나 나는 할일 없이 노는 사람이니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는 젊은이들이 편히 앉아서 쉬어 가도록 하시오. 더구나 나는 무임승차 했으니 요금을 내고 탄 사람이 앉아 가야지요. 옛날 생각하면 서서가는 것도 호강이지요. 오랜 시간도 아니고 잠시 잠깐 서서 가면 다리운동이 되어서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 자리에 다시 앉지 않았다. 이때 마침 배가 많이 부른 임산부가 세 살쯤으로 짐작되는 어린 아이 손을 잡고, 또 다른 한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탑승했다. 몹시 힘들어 보이는데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노인은 그 임산부를 불러서 앉아 가게 했다.

예의와 염치는 남을 배려하고 공경하는 일이며 사회 질서를 지키는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예의와 염치를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면서 모범을 보였기에 권위가 지켜졌다.

그런데 나 역시 남의 이야기 할 처지가 아니다. 나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일 때가 있고 나이를 앞세워 대접 받으려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만 많은 사람이 아니라 염치를 알고, 품격을 갖춘 어른으로 살기가 쉽지 않다.

약 력

≪월간문학≫수필 당선, ≪월간 문학공간≫시조부문 신인상,

수 상 : 브레이크 뉴스 문학예술상(시 부문), 타고르문학상(수필부문),

대표에세이 문학상,

여성문예원 공모전(수필부문), 샘터사 샘터상(생활수기부문),

저 서 : 수필집≪쉼표는 느낌표를 부른다≫ ≪선인장의 가시≫